삶은 해석이다

삶은 해석이다

[ 인문학산책 ] 77

최신한 명예교수
2022년 10월 27일(목) 06:31
빌헬름 딜타이.
성서해석학은 신앙인에게 비교적 익숙한 말이다. 성서해석학, 문헌해석학, 법률해석학은 각각 성서, 고대 그리스의 문학작품, 법조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기술로 정립되었다. 이 덕분에 인류는 경전, 고전문헌, 법조문에 깃들어 있는 존재의 비밀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슐라이어마허는 영역에 따라 상이하게 정립된 특수해석학을 종합하여 모든 텍스트에 적용 가능한 보편해석학을 체계화했다. 텍스트는 그 종류와 상관없이 언어와 저자의 특유한 사고로 구성된다. 따라서 보편해석학은 언어의 의미를 밝히는 문법적 해석과 저자의 생각을 규명하는 심리적 해석으로 세분된다. 올바른 성서 해석은 구절의 언어적 의미와 저자의 신앙적 삶이 녹아든 사유를 이해하는 데 있다.

딜타이(W. Dilthey, 1833~1911)는 저자의 사고에 초점을 맞추는 심리적 해석에 주목하고 저자의 사고가 용해되어있는 삶을 주제화한다. 삶에 대한 그의 관심은 삶의 철학으로 정립된다. 삶의 철학은 시간 속에서 영위되는 삶을 규명하려고 하므로 전통 형이상학의 이성적 규정을 따를 수 없다. 만약 유동적인 삶을 고정하여 개념화하면 이는 삶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 그 파괴가 된다. 삶은 이성적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그 섬세한 부분까지 묘사할 수 있는 해석의 대상이다. 따라서 삶의 철학의 방법론은 삶의 해석학이다.

딜타이는 '정신과학에서 역사적 세계의 건립'(1907~1910)이라는 제목의 저술에서 삶을 정신과 영혼의 운동으로 본다. 정신은 개인의 지평을 넘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로부터 영향받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삶은 개인들이 시공간적으로 나누는 상호작용의 연관이다. 상호작용은 자연의 인과관계와 달리,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접촉하는 인간과 정신세계에 대한 생생한 체험이다. 체험은 사람과 세계를 이성으로 파악하는 학문적 경험이 아니라 이들과의 정신적 만남이다.

정신적 만남은 그때마다 새롭고 생동적인 삶을 만든다. 새로운 것을 체험하는 사람은 내적 체험으로 만족하지 않으며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체험하는 삶은 표현하는 삶으로 이행한다. 표현 가운데는 새로운 체험이 녹아 있으므로 표현을 통해 삶은 더 확장된다. 표현에는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인륜, 법률, 국가, 종교, 예술, 과학, 철학까지 포함된다. 새로운 체험을 표현하면 개인의 내면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도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한다. 정신적인 것을 객관화하는 표현은 정신과학(인문학)을 형성한다. 정신과학을 자연과학과 구별한 것은 딜타이의 고유한 업적이다. 이것은 자연과학과 기술에만 집중하는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표현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이해를 요구한다. 새로운 작품이 나오면 이를 이해하려는 사람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주어진 표현을 이해할 때 새로운 삶의 연관이 발견되며, 이는 새로운 체험으로 이어진다. 이해는 표현의 동기가 된 최초의 체험으로 자신을 투입하는 제2의 체험이다. 이해는 제1의 체험에 대한 추(追)체험으로서 역사 속에 등장한 예언자, 시인, 정치가, 철학자의 삶을 자기화한다. 이렇게 보면 삶은 체험→표현→이해(=체험2)의 과정이다. 이 과정은 체험2-표현2-이해2(=체험3)로 나아가면서 순환을 형성한다. 체험에서 체험으로 진행하는 순환은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논리적 악순환이 아니라 새로운 정신세계로 진입하는 해석학적 순환이다.

삶에는 현재의 삶을 넘어서는 초월적 계기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삶 가운데서 뿐만 아니라 삶 위에서도 작용한다. 종교적 천재들의 풍부한 체험을 이해할 때 그들의 체험이 나의 체험이 되며 나의 삶을 새로운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변화된 삶에는 게으른 삶의 단조로움이 없으며 쾌락에 빠져 죽음과 영혼의 구원을 망각하는 일도 없다. 종교적 천재들의 체험을 이해하는 추체험은 교리상의 문제가 아니며 체험 주체의 심리적 문제만도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체험은 자신에게 부과된 삶의 여러 과제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표현은 후속 체험자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그를 변화시킬 수 있다. 반면에 이런 과정이 없는 신앙은 전승에 대한 맹목적 복종이거나 습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해와 해석은 신앙인의 삶을 늘 새롭게 형성하는 원동력이다.

성서 기자의 삶에 초점을 맞춘 심리적 해석은 경전과 같은 특정 텍스트의 이해를 넘어서 삶 전반에 대한 해석으로 발전한다. 해석은 이해의 심화이다. 삶은 주어진 것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수동적 체험에 머물지 않으며 능동적 해석을 통해 자기만의 체험에 도달한다. 자기만의 체험은 새로운 의미를 수반한다. 밖에서 주어진 것을 올바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활동은 자기의 삶을 주체적으로 만든다. 복잡다기한 체험은 자기 해석을 거치면서 고유한 자기를 형성하므로 주체적 삶을 향한 운동은 자기 해석에서 완성된다. 그러므로 자기 해석에서 생명력 있는 삶과 진정한 삶을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최신한 명예교수 / 한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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